포럼소개 프로그램 주제논문 해외참가작가 국내참가작가 게시판
해외작가 발제문 요지
르 클레지오 이문화 간 상호관계성과 예술의 기능
가오싱젠 이데올로기와 문학
앤드류 모션 낯선 이로 살아가기
류짜이푸 다원화 사회에서의 집체와 자아 권한의 경계
아미야 데브 세계화 속의 글쓰기- 인도를 참고로 하여
잭 로고 시 한편을 지으려면 행성이 필요하다
벤 오크리 신화, 이데올로기, 일별
잉고 슐체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문학
시마다 마사히코 테크놀로지와 퇴화
아나 마리아 슈아 다문화시대, 다매체, 세계 시장 시대의 글쓰기
앙투완 콩파뇽 소설이 존재하는 한…
한사오궁 수요와 욕구
요코 다와다 차를 마신다는 것 자연, 자유, 자살
국내작가 발제문 요지
김우창 삶의 이야기, 삶의 이론- 이데올로기, 진정성, 시장
박범신 다문화속의 자아와 타자
김성곤 서구 미디어에 나타난 한국인의 이미지
김인숙 세계의 문
유종호 멋진 신세계에서-겸허한 제안
이인성 저주받은 문학의 역설- 세계화 시대의‘잠자는 미녀’
최 윤 세계화와 문학적인 것의 회복
이승우 세계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이문열 내 문학과 이데올로기
정과리 이제 한국문학은 이데올로기를 먹어야 한다
정지아 이데올로기와 문학
구효서 늪을 건너는 법
복거일 세계화 시대의 언어와 글쓰기
조경란 궁극의 질문들
정이현 모든 것이 변하고 또 변하지 않는 시대에 던지는 몇 개의 물음표들
김연수 전자책이 가져가지 않은 것
정현종 나는 나 바깥에서 왔다- 지구 환경과 인간
최재천
정재서
생태문학과 생태비평에는 아직 생태학이 없다
성석제 나는 믿는다
김경욱 산책의 종말



해외작가 발제문
1) 기조강연
르 클레지오 <이문화 간 상호관계성과 예술의 기능>
나는 비교적 자립적이고 자국의 과거가 지닌 가치를 인식하고 있는 프랑스와 불가피하게 세계에 문호를 개방하여 이문화 간 상호관계성을 발전시켜야 할 필요성을 이미 인식하고 있던 모리셔스의 두 국가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모리셔스 사람들은 노예생활 속에서도 그들의 적응력과 개방성으로 자기들만의 크리올어를 만들고 고유 유산을 새로운 상황에 맞추어 가며 정체성을 재정립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오늘날 세계화 사회에서 대중문화는 획일화와 체제 순응주의를 대변하고 있다. 주제와 이미지의 동어 반복은 아무 영양가 없이 자기만족에 불과한 계속되는 ‘피드백’에 가깝다.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문학을 이용할 수 있을까? 분명히 선언할 수 있는 것은 첫째, 문화와 전쟁은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 쉽고 신속한 비즈니스와 정보의 교환을 기반으로 하는 문화적 제국주의의 위험이다. 나는 전쟁의 폐해와 문화적 제국주의의 해독제로서 예술과 문학을 늘 신뢰해왔다. 세계화는 선과 악처럼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문학, 그중에서도 특히 훌륭한 혼합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소설은 진정한 이종 간 결합의 장이다. 정체성의 상실과 획일적인 문화 심령체의 모든 활동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술이다.
가오싱젠 <이데올로기와 문학>
이데올로기가 문학에 개입하는 일은 20세기에 있어 지극히 보편적인 현상이었고 오늘날의 문학도 이데올로기의 잔재와 이윤의 법칙에 의해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본래의 문학은 이데올로기와 정치를 초월하고 작가는 인류 생존 조건과 인간성의 증거로서 문학에 기여해야한다. 진실하고 성의에 찬 문학이 현 시대 사람들이 기대하는 문학이며 문학은 시적 정취를 통한 자주독립이 필요하다. 그야말로 문학은 정신 빈곤 시대의 기탁처가 되어가고 있으니 현 시대의 문학이 결코 쇠망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느 정도 설명해 준다. 다만 어느 때에 가서야 문예부흥이 재현될 수 있을 것인가는 단지 역사의 우연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 문학은 흡사 생명과 같이 하나 하나 우연에 의해 결정되는 개별적 사안이기 때문이다.
2) 다문화 시대의 자아와 타자
앤드루 모션 <낯선 이로 살아가기>
모든 시에는 ‘내가 중요하다’는 외침이 담겨 있고 이 말은 ‘나는 다르다’를 암시한다. 우선 작가는 누구나 낯선 이로 살아가고 있으며 확고하면서도 유연한 사고체계를 가지고 세계를 관조하고 삶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존재이다. 또한 지난 50년 동안 그 어느 시기보다 인구 이동이 전 세계적으로 활발해졌기 때문에 낯섦에 대한 우리의 관심(그것을 향한 조바심, 호기심, 혐오, 환대, 적의, 포용)이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시급해졌다. T.S 엘리엇, 에즈라 파운드, 오든의 시를 통해 우리는 이방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시 쓰기에 어떻게 형상화되어 있는지를 볼 수 있으며, 라킨의 시에서는 익숙한 고향이 존재론적인 승인에 걸림돌이 되고 오히려 낯선 아일랜드에서의 경험이 작가다운 본능대로 살기, 즉 한 발짝 떨어져 살기, 회의적인 눈으로 바라보기, 자아를 억제하기 등을 강화해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개별 사례들을 들여다보고 각자의 독특한 경험을 존중하면서 발견하는 공통분모를 통해 우리들은 서로 공유하고 있는 인간성에 대한 생각을 강화하게 된다.
류짜이푸 <다원화 사회에서의 집체와 자아 권한의 경계>
자아와 타자의 관계에서 중국 역사는 전복을 거듭해왔다. 청말 주류였던 옌푸의 사상은 자아를 타자, 즉 국가의 도구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이후 중국은 개인을 부각시키고 개성을 선양하는 5.4 신문화운동과 개인의 자아가 개인보다 더 큰 집체의식, 계급의식에 의해 대체되는 시기를 거쳐 80년대 들어서 다시금 개인자유의 기본적인 원리를 강조하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샤르트르의 “타자는 자아의 지옥”이라는 명제와 레비나스의 “인도주의”로 구분할 수 있는데 결과적으로 나는 두 명제 모두 다원화 사회에서의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잘 이끌어주지 못하며 이 문제를 “상호주체성(Inter subjectivity)”의 관점에서 접근해야한다고 본다. “타인은 자아의 지옥”이라는 명제는 얄팍한 자유주의자들에게 무제한적인 자아의 확장과 발전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제한이 있을 때 비로소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레비나스의 “사회주의적 인도주의” 또한 계급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자아를 희생시키는 것으로 생명개체에 대한 존중을 상실한 공허한 이론일 뿐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바로 균형점이다. 다원화 사회에서 우리는 자아-개체생명의 가치와 존엄뿐 아니라 그 유한성도 확인해야하며 자아와 타자의 관계가 유동적인 것임을 인지해야한다.
3) 문학과 세계화
아미야 데브 <세계화 속의 글쓰기-인도를 참고로 하여>
세계화는 전자의 힘을 빌린 커뮤니케이션의 혁명이다. 물론 이 즉시적인 커뮤니케이션으로 세상이 더 살기 좋은 곳이 되어가고 있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제 우리는, 그동안 확연한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유지되었던 ‘세계’ 에 대한 기존 관념, 즉 지구 문명이라던가 지구 정치라는 개념을 더 이상 고수할 수 없게 되었다. 문학에 있어서 세계화의 양상은 자본주의와 앵글로벌리제이션(Anglobalization)으로 요약될 수 있다. 여기서 ‘사회적 배경’ 은 거의 실종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 같이 똑같고 시장 중심적이기만 한 세계화의 얼굴도, 비난과 배척으로 일관하지만 않는다면, 문학적 표현을 통해서 곰곰이 들여다 볼만한 주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이 세계화에 대한 대안으로 내놓은 ‘전(全) 지구성(Planetarity)’이 있다. 세계는 세계 자본주의가 지금 하고 있듯 싸워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이지만 전(全) 지구는 우리에게 대여된 것이다. “내가 정성스럽게 쓸고 닦아야 할 여기 내 집.” 이 말은 세계 온난화가 이미 진행 중인 요즘에 들어서 더 특별한 의미를 띠는 듯하다. ‘집’ 에 가능한 한 더 가깝게 접근함으로써 오늘날의 글쓰기가 재앙으로부터 인류를 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잭 로고 <시 한편을 지으려면 행성이 필요하다>
나는 서정시, 즉 가잘(ghazal)의 형식으로 씌어진 나의 작품을 통해 문학에 반영된 세계화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처음 가잘을 알게 된 것은 스페인의 위대한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를 통해서인데, 나는 아랍 문화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인도 카슈미르 출신의 시인, 우르드어, 모더니즘 시, 일본 렌가 및 하이쿠에까지 영향을 받아 비로소 가잘을 창작할 수 있게 되었다. 요컨대, 이 짧은 가잘은 “80가지 문학적 영향력으로의 세계일주(Around the World in Eighty Literary Influences)" 즉, 짧은 행성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작가들이 자신의 조국과 그 외 자신이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집단의 문학적 전통을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하는 한편, 작품 속에서 이런 종류의 행성적인 연관성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지구 환경 및 국가간 관계도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해야한다고 본다.
4) 이데올로기와 문학
벤 오크리 <신화, 이데올로기, 일별>
신화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파악하고 기호화한 것이며, 여러 가닥의 실이 엮여 단단한 밧줄의 형태를 이루듯이 우리의 여정에 엮여 들어가 있다. 신화는 근본적으로 이데올로기와 구분될 필요가 있다. 그 두 가지가 같은 그림자를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신화는 인간사의 본질에서 생겨나지만 이데올로기는 인간사에 부여된다. 신화가 본질적이라면 이데올로기는 의도적이다. 사회가 스스로 마지막 정의에 도달했다고 믿으며 자기 정의를 사회의 구성원보다 중요한 원칙으로 격상시키는 순간 우리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보유하게 된다. 국가는 마치 운명처럼, 밤처럼, 인간보다 훨씬 큰 존재로 군림하고, 인간은 국가가 정해주는 만큼의 존재로 그치게 되는 것이다. 설령 개인의 이데올로기처럼 보이는 경우라도 실제로 그것은 개인주의의 이데올로기이다. 동시에 이데올로기는 사회를 이루는 핵심이다. 어떤 면에서 사회는 대립되는 여러 이데올로기의 전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학은 이데올로기와 인간의 본성, 이데올로기와 자유 간의 끝없는 대화이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해 말하는 문학도 귀중하지만 나는 진정한 인간의 조건은 동굴 안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것이라고 말하는 문학을 꿈꾼다.
잉고 슐체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문학>
어린 시절 나는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어 작가가 되고자 하는 희망을 가졌다. 유명한 사람이 되면 동독 정부가 나를 징집하는 것을 포기하고 서독으로 보낼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한때는 시로 한 국가를 뒤흔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으나 분단 이후에는 글을 쓸 필요보다는 직면한 삶 자체가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동, 서독간의 통일은 완전한 통일이 아닌 서독으로의 ‘편입’이며 그것은 곧 옛 종속이 사라지고 새로운 종속의 시대가 온 것을 의미한다. 그 상황의 여러 가지 단면은 사유화, 신자유주의, 글로벌화, 포스트식민지주의, 사회주의 국가의 철폐 등등으로 묘사된다. 독일에서 현 상태를 비판하는 사람이 동독 출신이면, 그는 즉시 1989년 이전의 상태를 회복하고 싶은 자, 동독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는데 바로 그러한 사고가 나는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한다. 문학은 사회의 자기이해를 위해 사용될 수 있고 또한 사용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그 어떤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문학이 가장 영향력 있는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5) 다매체, 세계시장, 글쓰기
시마다 마사히코 <테크놀로지와 퇴화>
최근 발달한 컴퓨터 과학기술과 인터넷은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을 총체적으로 바꾸어놓았다. 하지만 빠르고 쉽고 편리한 것은 모두 지루하며 과학 기술의 진보는 살아있는 인간의 능력을 퇴화시키는 것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미디어는 대중의 기억력, 책을 객관적으로 읽어내는 힘과 행간을 집어내는 감, 빈정거림과 유머를 이해하는 센스를 빼앗아 그들을 우민화시키는 데 지대한 효과를 발휘했다. 그 중에서도 고대인들에게는 있었으나 현대인들에게는 모자라는 것. 유년기에는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있었으나 이제는 취약해진 것이 있는데 그것은 ‘꿈꾸는 힘’이다. 고대인들은 꿈꾸는 힘을 통해 신화를 탄생시켰고 그것은 현대인들의 사상과 경험으로 계승된다. 따라서 신화와 현대의 과학과 철학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며 신화는 또한 자연의 위협과 겸허함을 가르쳐 주고 일상생활과 다른 시간 축을 제공하는 역할도 한다.
아나 마리아 슈아 <다문화시대, 다매체, 세계 시장 시대의 글쓰기>
오늘날의 글쓰기가 다른 어떤 시대의 글쓰기와 특별히 달라야 할 이유가 있는가? 작가라면 세계를 구성하는 체계와 관습이라는 장벽에 예민한 촉각을 세우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의미를 찾기 위해 이러한 체계의 질서에 도전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세계가 변하고 있으며 그 변화가 우리의 글쓰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나의 소설 『부작용으로서의 죽음』은 세계화나 신자유주의에 대한 소설이 아니지만 세계화의 꿈은 악몽이 된 지금 내 의도와 상관없이 이를 예견하는 글이 되었다. 한편, 현대 문학에서 단편소설이 점점 사라지고 ‘글로벌’이 자본력으로 평가되는 등 악영향과 신생 장르의 각광이라는 긍정적인 영향이 다양하게 드러나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학은 정치적 의무를 초월해있다. 훌륭한 문학에 훌륭한 의도란 건 없다. 문학은 홍보책자가 아니어서 좋은 의도로 가득 채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문학이 예술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지금까지 예술은 변한 게 거의 없다. 언제나처럼 비실용적이되 필수적인 것으로, 인간의 삶이란 반짝 타올랐다가 영원이라는 어두운 안개 속으로 소멸하는 한낱 작은 불꽃에 지나지 않음을 상기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6) 지구환경과 인간
앙투완 콩파뇽 <소설이 존재하는 한…>
세계화 시대에 문학이 계속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심화되고 있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 문학이 거의 국가 정체성과 동일하게 인식되는 만큼 더욱 세계화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적극적으로 반격하고자 한다. 외국인들이 관심을 갖는 프랑스 문학은 프랑스의 현실에 대해 말하는 작품들로서 상당수의 작품들이 이민자 2세나 불어권 작가들에 의해 쓰인 것이다. 그것은 별로 놀라운 것은 아니다. 우리는 타자와 타자의 문화, 사회,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소설을 읽기 때문이다. 한편, 각종 전자기구들의 발달로 인한 독서 양식의 변화 또한 주목할 만하다. ‘하이퍼 텍스트’를 통해 독서는 더 시각이미지화될 것이며 반면 덜 상상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설의 계층, 매체적 ‘오염성’이야말로 소설 고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라블레, 도스토예프스키, 프루스트, 그로스만은 그들에게 가능했던 방식을 통해 이를 보여주었다. 오늘날 같으면 이들은 인터넷을 쓰고 있을 것이다.
한사오궁 <수요와 욕구>
오늘날 “금전 본위”가 활성화되면서, “인간 본위”는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처럼 소비는 많으나 질은 낮은 삶이 바로 현대화된 삶이며 이런 의미에 있어 “아메리칸 드림”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현대화 모델은 위태로운 환상이다. 탐욕에서 비롯된 금전 본위의 삶은 타인들에게 생태적인 문제를 전가하는 한편, 문화적인 악영향도 끼치고 있다. 다원화는 다원적인 천편일률에 불과하고, 개인화는 개인적인 천편일률에 불과하게 되었으니, 마치 전 세계의 도시가 갈수록 한 도시처럼 변하고, 문화의 풍부성과 원초적 생명력은 점점 감퇴되는 것 같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나는 사람들이 자신의 특유한 생태와 생활 및 특유의 문화적 전통 자원에 대해 더욱 근원적인 뿌리를 찾는 노력을 펼쳐야 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 아시아 문화 전통 속에는 자연을 존중하고 보호하려는 적지 않은 사상적 자원이 잠재해 있다. 이제 진정한 ‘행복’을 위해 수요와 욕구의 구분에 대해 숙고하고 탐욕의 생명에 대한 위해성에 대한 옛 사람들의 경고를 되새겨야 할 때이다.
요코 다와다 <차를 마신다는 것 : 자연, 자유, 자살>
2008년 독일에서 출판된 『차의 달인의 죽음(The Death of the Tea Master)』을 통해 "정보 환경"의 급속한 퇴보와 그로 인한 일본 내부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나는 인터넷 정보를 무조건적으로 믿는 오늘날의 세태가 매우 염려스럽고 활자화된 교과서 및 수험서 또한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본다. 특히 일본은 과거사에 대한 반성 없이 자족적인 생각과 스스로 만든 위상에 갇힌 형국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교과서에 없는 역사를 소설에서 배웠는데 이 소설은 인간이 갖는 야망의 문제와,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는 리큐를 조명한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은 권력과 야망의 관점에서 본 국제관계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는 동시에 언론의 자유에 대한 소설로도 읽을 수 있다. 그 단서는 바로 욕망과 중독이다. 욕망은 때로 너무나 위험해서 인간에게 위협이 되며 오늘날 사회에서 욕망은 기형적인 단계에 이르렀고, 알코올 중독을 비롯한 여러 가지 중독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런 사회에서 문학은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해주기보다 독자가 원하는 것이 메시지라면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스스로 메시지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우리에게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장소, 즉 환경을 마련해준다.



국내작가 발제문
1) 기조강연
김우창 <삶의 이야기, 삶의 이론 - 이데올로기, 진정성, 시장>
삶에 대한 이해의 방식에서 이야기와 이론은 언제나 대결한다. 한국에서 이러한 이론과 이데올로기는 문학에서 큰 영향을 발휘해왔으며 이것이 작가들에게 특정한 지위를 부여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문학은 언제나 선과 악의 판단을 시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종의 도덕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이데올로기에 대한 의존은 문학적 상상력의 범위를 제한하는 동시에 도덕적 파급력으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적어도 문학은, 이론에 의한 인간 현실의 단순화를 거부하고 모순의 전폭을 드러낼 수 있는 여유를 갖는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시장의 자유 속에서 쉽게 상실되는 것은 과거의 문학에서 전통적으로 무겁게 다루어져왔던 윤리적. 명증성의 파토스와 진정성의 추구이다. 오늘날 작가는 소비자와 공급자의 관계 내부에서 콘텐츠를 공급하며 출판업의 경제논리에 영향을 받는 상태이자 기술과 출판 정보의 폭발, 생각의 전자화 등을 겪고 있다. 오늘날 작가들에게 필요한 태도는 가벼운 마음과 윤리의 조화, 보편적 대동화합을 항하는 흐름이 된다는 가정 하에 세계화로 인한 평준화와 통속화의 긍정과 정신적 파토스 추구의 균형을 찾는 것이 될 것이다.
2) 다문화 시대의 자아와 타자
박범신 <다문화속의 자아와 타자>
문학은 기본적으로 삶의 조건을 이루고 있는 가치의 충돌을 주목해야 하고, 그것이 어떻게 반인간적으로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지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주노동자문제는 물론, 건강한 다문화사회로 가는데 장애가 되는 다양한 문제들은,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우리가 짚어야 할 가장 부조리한 현실의 한 부분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문제의 현실성과 중요성에 비추어볼 때, 그 양적 생산성이 매우 미흡할 뿐만 아니라, 문학적 성과에서도 의미 있는 생산효과를 거두고 있지 못하다는 게 일반적인 진단이다. 우리의 ‘이웃’으로 편입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 사회의 풍향계를 자처하는 문학에서조차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다른 예술장르는 물론 사회전반의 관심 또한 요원할 수밖에 없다. 최근의 우리 문학은, 어쩌면 우리네 삶의 현실적인 조건에 대해, ‘나’와 ‘타자’ 또는 ‘우리’와 ‘이주민’의 실존적인 관계에 대한 모색에서, 직무유기의 타성에 빠져 있다고 본다. 이주노동자나 외국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불건강한 이중성을 벗어나 합리적 이데올로기를 구축하기 위해선 정책에 앞선 문화적 어필이 우선되어야 한다. 문화의 최저층을 이루는 것은 물론 활자중심의 문학일 것이다. ‘한국문학’이 이주노동자나 다문화가정에 더 많은 역량을 기울여야 하는 당위가 여기 있다고 본다.
김성곤 <서구 미디어에 나타난 한국인의 이미지>
아시아인들은 미국 사회 내에서 지나치게 전형화 된 시각 때문에 개인의 존엄성과 특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아시아인으로서만 취급받는 동시에 아이러니컬하게도 외모의 차이가 너무나 두드러져서 금방 눈에 띄고 만다. 특히 <프리즌 브레이크>, <007 어나더데이>, ,<패시파이어> 등 각종 스크린에서 뿐 아니라 소설 『저스트 원 룩(Just One Look)』과 같이 다양한 매체에서 한국과 한국계 미국인의 이미지가 대개 부정적으로만 그려지는 상황이다. 현재 서구사회에 편만해있는 한국에 대한 전형화와 편견을 불식시키고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널리 알리려면 우리의 긍정적인 면들을 최대한 부각시켜야만 할 것이다. 그 방법의 일환으로 할리우드가 한국을 다룬 영화를 제작하도록 설득하거나 우리 스스로 좋은 영화를 만들어 할리우드 배급사를 통한 수출하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또한 할리우드는 자타가 공인하는 꿈의 제조공장으로 이 다문화주의 시대에 문화적 편견에 근거한 인종적 전형화를 영화에 재현해서는 안 된다. 그건 꿈이 아니라 악몽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인숙 <세계의 문>
문학은 각 국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 없이도 공유 가능한 보편적인 감정을 바탕으로 한다. 더욱이 문학에 있어서 다르다는 것은 차별이나 경계가 아닌 낯선 것과의 역동적인 만남이며 그를 통해 역설적으로 발전된 소통의 매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문학의 의미에 대해 여전히 탐색하고 있다. 결국에는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에 감동을 받더라도 소설은 단순히 어떤 핵심적인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에 다른 문을 열고 접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급속히 증가하는 다문화 가정 및 문화의 확산을 통해 오늘날 한국문화가 ‘민족적’인 것만을 운운하기에는 보다 더 광범위해졌으며, 역동적이 되어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한국문학이 한국 속에 들어있는 세계를, 세계 속에 들어있는 한국을 끌어안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분명해 보인다. 이렇듯, 문학은 자신에 대한 탐색을 통해 세계의 확장에 기여함으로써 스스로 세계에 참여할 수 있어야한다.
3) 문학과 세계화
유종호 <멋진 신세계에서-겸허한 제안>
현대인은 탈공업사회의 도래와 디지털 혁명이 야기한 여러 변화들로 인해 파스칼이 생각한 조용히 집중할 수 있는 '자기 방‘을 가질 수가 없게 되었다. 이 “멋진 신세계”에서 문학의 지위는 계속 하강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전자민주주의 시대의 특산품은 요즘 우리 사회에서 새로운 문학형식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인터넷 소설일 것인데 여기서 가장 주목할 점은 시청각적매체와 경쟁하는 문학의 성찰 없는 언어와 문체의 문제일 것이다. 일례로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현상이 수용자 측의 하향평준화 경향을 드러내준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우리는 묻게 된다. 새로운 문학과 예술의 생산은 진정 끊임없이 필요하고 계속되어야 하는 것일까? 물론 오늘의 문제를 다루는 오늘의 문학은 필요하므로 나는 영구적인 것이 아닌 10년 정도의 시한을 둔 문학생산중단을 제안한다. 많은 고전을 재음미함으로서 문인들은 문학의 위엄을 재확인할 것이고 독자들은 문학적 안목의 향상을 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고전의 풍요함을 실감하는 것도 새 경험이 될 것이다.
이인성 <저주받은 문학의 역설- 세계화 시대의 ‘잠자는 미녀’>
비유를 동원하자면, 오늘날의 본격문학은 마치 저주에 걸려 긴 잠에 빠진 ‘잠자는 숲속의 공주’나 마찬가지가 된 듯하다. 일종의 알레고리로 풀자면 이렇다. 언어의 왕국에서 고대하던 공주가 문학의 이름으로 태어났지만, 미술 요정, 음악 요정 등, 여러 요정들이 모여든 축하연에 초대되지 않은 영화 요정의 저주를 받게 된다(그 요정까지 대접할 수 있는 황금 접시가 애당초 모자랐다는 것은 그 당시엔 그런 요정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결국, 한창 꽃 피는 나이에 이르러, 그 요정이 노파로 변신하여 시청각적 실을 뽑아내고 있던 디지털 문명의 물레에 혹해 다가갔다가 그 바늘에 찔리고 만다; 그러자 언어의 성 전체가 그 순간 속에 멈춰 시간의 흐름마저 정지된 긴 잠 속으로 빠져버리는 것이다. 차후 100년 동안, 언어의 성은 가시덤불 숲에 쌓여 밖과 차단되고 그 속에 잠들어 있는 아름다운 문학 공주는 ‘가시장미’라는 은유적 이름의 전설로만 회자될 것이다. 마침내 백마를 탄 독자(讀者) 왕자가 찾아와 입을 맞출 때까지…
최윤 <세계화와 문학적인 것의 회복>
문학의 세계화는 다른 영역에서의 세계화와 달리 아주 독특한 양상으로 표출되고 있다. 다른 영역에서의 세계화가 ‘탈 경계적인 삶’으로 요약될 수 있다면 문학에서의 세계화는 이제까지 ‘보편주의’의 이름으로 서구의 근대문학이 캐논으로 자리를 잡았던 상황에서 소수언어에 속한 나라의 문학이 점차 타언어로 번역되고 출판되는 현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물론 존재의 총체적인 구조화를 요청하는 언어 장르로서 문학의 세계화는 그리 용이하지 못하며 자연스럽게 ‘팔릴만한’ 문학작품의 수출하려는 위기를 겪기도 한다. 하지만 문학에는 나름대로 작품에 내재해있는 유의미한 것으로 인해 공간과 경계를 넘는 자기 통제의 구조가 있다. 여기서 나는 세계화가 문학에 끼친 영향 분석 뿐 아니라 문학이 세계화에 기여할 수 있는 제안을 하고자한다. 첫 번째 문학의 역할은 언어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순간적이며 부유하는 세계화의 흐름 속에 시간성을 역설하고 존재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역의 흐름을 제안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유물적 세계화 시대에 물질과 정신, 육체와 영혼이 미래적으로 결합하는 융화의 문학적 시도를 기대한다.
이승우 <세계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오늘날 세계화 시대에 순발력 있게 대처하여 더 큰 콘텍스트 속에서 작품을 쓰는 것이 작가에게 요구되고 있다. 하지만 문학, 특히 소설의 경우 이러한 즉각적인 변화가 수용되기 힘든 매체이다. 흔히 한국 작가의 작품이 세계 문학계의 변방에 위치하고 ‘세계의 독자가 읽을 만한 것이 담겨있지 않다’는 인식이 있다. 그러나 세계의 독자를 염두에 둔다는 전제부터 의문스럽다. 그러한 인식에는 세계가 오래전부터 보편을 점유해온 서양을 은연중에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독자의 개념 또한 재정립되어야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독자란 실제적으로 시장을 가리킨다. 근본적으로 이것은 문학적 고뇌의 산물이 아니라 상업적 전략의 표출인 것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세계의 변화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내면화한 채 자기 문학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문학의 위기를 말한다면, 그것은 세계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세계의 변화를 감시하고 비판하고 도전하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할 문학이 오히려 세계에 흡수되고 세계의 변화를 추종하는 것으로 살아남으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다.
4) 이데올로기와 문학
이문열 <내 문학과 이데올로기>
아버지 살해와 아버지 찾기 사이의 오락가락의 끝난 뒤로도 나는 아버지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긍정과 부정 사이에서 헤맸다. 그러다가 역사적 허무주의의 세례를 받으면서 마침내는 반(反) 이데올로기 쪽으로 길을 잡는다. 나는 이데올로기를 인간을 위한 어떤 것으로 믿어왔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들은 모두가 기이한 전도(顚倒)를 겪고 있었다. 원래 인간을 위한 수단으로 고안되었던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한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순간 오히려 인간을 자기 확장의 수단으로 삼았고 인간의 복리증진을 위해 자신을 내던져야할 이데올로기가 거꾸로 인간을 희생으로 삼아 자신을 번성을 도모하는 목적의 전도를 일으킨 것이다. 거기서 반(反)이데올로기의 논리를 키워가던 나는 다시 탈(脫) 이데올로기, 그리고 더 나아가 무(無)이데올로기에 이르게 되는데 무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오직 이데올로기에 의해서만 부정되고 무화(無化)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없어진 그 자리에 새롭게 채워진 그 이데올로기는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나만의 이데올로기에 의지해 유사의식과 정신적 허영과 지난한 싸움을 벌이는 동안 내 문학이 상처입고 변질되었을지는 몰라도 거기에 실린 내 본질적 이데올로기만은 변질되지 않았으며, 아직까지도 문학은 나에게 이데아만큼이나 휘황한 이데올로기로 남아있다.
정과리 <이제 한국문학은 이데올로기를 먹어야 한다>
이데올로기는 인간을 주체화시키며 동시에 노예화한다.‘나’는 공동체의 소망을 성취하는 영웅이 될수록 공동체의 하수인이 되며 ‘나’는 ‘자아의 이상’에 근접하면 할수록 ‘이상적 자아’의 환몽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체화와 탈주체화는 불가피하게 상반적이면서 동시에 상보적인, 동시적 작용으로서 운동하기를 요청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제는 저 모순으로서의 상보성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나는 문학이 바로 여기서 자신이 개입할 자리를 발견한다고 생각한다. 문학의 역할은 이데올로기의 순환과정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기관에 잠입하여 “천당이든, 지옥이든” 아랑곳 않고, 오로지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보들레르). 1990년대 이후의 한국문학은 서둘러 이데올로기로부터 달아나는 데서 바로 순수한 개인의 세계를 찾았다. 혹은 그 개인의 세계가 어떻게 훼손되는가를 보여주는 데서 세계의 상처를 읽어 왔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보다도 그것을 외면하거나 포장할 게 아니라, 저작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반갑게도 나는 최근의 몇몇 소설들과 시들에서, 이미 이데올로기와 먹는 싸움들을 개시한 기미를, 이미 먹기 시작한 흔적을 발견한다.
정지아 <이데올로기와 문학>
한국사회는 민주화를 거치면서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이데올로기가 극복되고 민주주의를 획득했느냐는 질문에는 회의를 느낀다. 세계적으로 사회주의가 폐기처분되다시피 한 오늘날까지 국가적 차원에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금지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의 거의 유일하고, 1948년 단독정부가 수립된 이래 남한에서 점차 드러나는 모순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한 번도 비판의 대상이 되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작가는 하나의 절대적 이데올로기를 신념화한 사람이기보다 언제 어디서든 당대의 모순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류 역사를 진보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더 많은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가 확보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주체성을 신뢰하면서, 인간 다수의 자유와 권리를 확장하기 위한 새로운 대안을 찾는 것, 이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이며 아마도 목적일 것이다.
구효서 <늪을 건너는 법>
이데올로기는 이데아에서 출발한다. ‘진짜’ 세계가 있다는 믿음이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텍스트를 기반으로 이 문제에 대해 설명하려 하며, 20년 전 발표한 『늪을 건너는 법』에서 친어머니를 찾는 주인공을 통해 ‘진’과 ‘위’의 위계가 뒤집히고 그 구별이 의미 없어지는 순간에 대해 썼다. 이후 『비밀의 문』에서는 실제로는 폭군이었던 아쇼카왕을 등장시켜 ‘선’과 ‘악’의 전복 및 언어로써 규명되는 미에 대해 다루었다. 언어는 한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으나 그것이 곧 ‘진짜’는 아니며 결국 소설가로서 내가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천착해야할 일종의 도구일 뿐이다. 결국 무명의 늪을 건너 이데아에 도달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또 하나의 늪임을 인식, 이데올로기가 빠져나올 수 없는 늪이라면 하나의 이데올로기에서 빠져나와 다른 이데올로기로 건너가는 과정 자체를 직접 목도하고 끊임없이 자기 반성을 하는 것이 소설가로서 소명일 것이다.
5) 다매체, 세계시장, 글쓰기
복거일 <세계화 시대의 언어와 글쓰기>
지금 글쓰기는 어느 때보다 번창한다. 문화의 진화와 세계화는 작가들에게 점점 큰 시장을 제공한다. 이런 추세를 더욱 강화해서 문화가 보다 잘 진화하도록 하려면, 우리는 언어 장벽을 낮추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그 일에서 작가들은 큰 공헌을 할 수 있다. 그 일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작가들은 자신들이 다루는 매체인 언어에 대해 보다 깊이 성찰해야 한다. 언어가 정보의 전달과 처리에 쓰이는 수단이고, 통상적으로 언어로 여겨지지 않는 생물학적 언어와 수학과 같은 언어들이 근본적 중요성을 지니며, 신호 언어가 처음 나온 언어이고 아직도 무척 중요하며, 모든 현존하는 언어들이 실은 하나 또는 몇 개의 원시 언어에서 진화한 것들이고, 언어에 대한 민족주의적 태도가 그리 현명하지 못하며, 언어 장벽을 낮추는 것이 문화의 진화에 긴요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작가들은 ‘풍속의 심판관’이 되려는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특히, 언어의 심판관이 되고 싶은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 어떤 이유로도, 심지어 자신의 모국어를 지킨다는 명분으로도, 작가들은 언어의 진화를 막아선 안 된다. 언어의 진화에 필요한 좋은 변이들을, 즉 좋은 문체들과 표현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으로 충분하다.
조경란 <궁극의 질문들>
내향적이고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적응력이 부족한 나에게 ‘걷는다’ 는 행위는 쓰는 일이 손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발과 몸 전체가 세계와 맞닿은 결과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다. 21세기, 이 다채로운 다매체 시대에 나는 내가 어떤 특별한 것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방법도 알지 못하고 개인 홈페이지나 채널, 페이스 북 같은 것도 없으며 세계시장을 겨냥해 의도적으로, 소설 속에 한국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만들어 넣을 생각도 없다. 속도감 있고 빠르고 다이렉트한 것에는 관심을 갖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있어 세상을 향해 유일하게 열려있는 것은 언어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계속해서 내가 세계에 속해있음을 긍정하기 위해 두려움과 소통에 대한 글쓰기를 해나갈 것이다.
정이현 <모든 것이 변하고 또 변하지 않는 시대에 던지는 몇 개의 물음표들>
처음에는 일상의 일기장처럼 사소하게 시작했던 트위터. 팔로워 숫자가 내 통제 영역을 넘어서면서 내 영혼도 함께 들썩였다. 팔로워-독자들을 향해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감출 것인지를 놓고 내면에서 치열한 갈등이 벌어졌다. 그리고 곧 내가 나가떨어지고 말았다는 사실을 쓸쓸히 인정해야 했다. 궁금하다. 나는 왜 '시장'이라는 말에 본능적인 이물감을 느낄까. 한없이 고상한 (척 다루어지던) 문학텍스트가 세계시장이라는 말 앞에 서면 갑자기 너무도 쉽게 애국 상품의 대상으로 변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저널리즘을 위시한 그 이중적 태도가 불편하다. 어쩌면 'International Market'이라는 개념 자체가 허상인지도 모른다. 주변에서 중심을 앙망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영어권나 유럽의 작가들은 구태여 세계시장이라는 단어의 정체성을 고민할 필요가 없을 터이니. 그럼에도 외국의 독자들에게 널리 읽히고 싶다는 바람과, 영어로 번역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는 뿌리 깊은 콤플렉스는 떨치기 어렵다.
김연수 <전자책이 가져가지 않은 것>
소설의 텍스트는 두 겹으로 이루어져있다. 한 겹은 실제로 활자화된 ‘겉모습’그 자체인 동시에 다른 추상적인 것을 가리키는 지시적 도구로서의 텍스트이고 다른 한 겹은 1차적 텍스트를 넘어 해석되어야할 추상적 본질에 관한 정보이다. 소설은 미술이나 다른 여타 예술에 비해 선험적인 경험이 현실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난해함을 간직하고 있으며 책이 텍스트를 해석할 수 있는 독자의 손에 오기 까지 ‘도서계’의 해석이 덧붙여지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전자책의 성공은 우선 기존의 도서계를 붕괴시킨다는 점에서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예고한다. 전자책 이후의 독자 앞에 놓인 소설은 두 겹의 텍스트라기보다는 단일한 텍스트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도서생태계의 붕괴, 1차적 텍스트의 영향력 축소, 난해함의 종말 등은 책의 물질성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전자책은 자신이 가져가지 않고 종이책에 남겨두는 이 물질성에 대해서 좀 더 숙고해야만 할 것이다.
6) 지구환경과 인간
정현종 <나는 나 바깥에서 왔다-지구 환경과 인간>
오늘날 지구 환경을 위협하는 재앙은 외면할 수 없는 문제이며 나라, 인종, 종교, 이념, 민족 따위들을 뛰어넘어 인류가 마음을 합해 대처해야 할 일이다. 모든 생물의 생존 조건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절제’의 마음이다. 더욱이 우리 각자는 내 바깥에서 온 존재이다. 우리 뼛속의 칼슘과 핏속의 철분은, 태양이 생겨나기 전에, 우리 은하계에서 폭발한 이 별들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지구 환경 보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업인들과 정치인들의 의식적 자각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의 자각을 위해 객관적, 과학적 데이터의 연구와 동시에 예술이 기여할 수 있는 바를 고려해야 한다. 예술작품에서 받는 감동에 의한 변화는 좀 더 근본적이요 전신적(全身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재천(정재서 공동집필) <생태문학과 생태비평에는 아직 생태학이 없다>
바야흐로 세계가 생태학을 주목하고 있는 시점이다. 복지와 건강이 단연 다가올 시대의 최대 화두인 만큼 생태학이 가장 중요한 기초학문으로 자리를 잡을 것이라는 예측이다. 이러한 학문적 흐름이 발맞추어 나는 새로운 생태비평 정립의 가능성에 대해 가늠해 보고자 한다. 넓은 의미의 생태문학 범주에서 대부분의 서양 문학작품들은 단순히 자연을 서술하는데 그치고 있어 성숙한 의미의 생태문학이라고 보기 어려운 반면, 동양문학은 본질적으로 정경교융(情景交融)의 사고를 지니고 있어 인간과 자연의 본질적 평등성과 객체로서 존재하는 자연이 아닌 내면화된 자연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고전문학에 풍부한 생태적인 자산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연구는 최근에서야 활발해진 편이다. 나는 여기서 중국 신화, 중국 소설, 중국 고전산문 및 고전시, 한국 고전시와 한국 현대시를 바탕으로 생태학적 비평을 시도하려한다.
성석제 <나는 믿는다>
오늘날의 환경, 식량, 질병, 국가 간 빈부격차 및 소득 분배 문제에 대해 “지구의 나이, 조상, 문자, 문맹, 빙하기, 핵겨울, 생명체, 농장, 농부, 닭, 소, 우유, 얼음의 사막, 학질(虐疾), 소홀히 다뤄지는 질병(neglected disease), 벼락, 지구에서 가장 큰 인공구조물, 눈과 눈, 원유 생산단가, 아이티, 미국” 등 다양한 키워드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예를 들어 지구 온난화는 지구가 인류에게 적응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지구가 인류에 대해 적응하면 인류가 변화한 지구에 대해 적응을 해야 할 것이다. 서로에 대한 적응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그럴 의미가 있는지 결과가 어떻게 될는지 아무도 모른다. 현재 이 자리를 포함한 지구상의 어느 곳도 어떤 순간도 안전하지 않다. 지금 당장 지구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어떤 행동이든 시작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김경욱 <산책의 종말>
인류 최초 달 탐사의 본질적 의미는 지구를 떠나 지구를 바라보게 된 경험, 즉 자신을 떠나 자신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된 ‘산책’으로 볼 수 있다. 자기 발견으로서의 산책에서 중요한 것은 공간이 아니라 군중이다. 군중은 우리의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신만의 골방에서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없다. 일례로 10여 년 전 무릎 수술의 여파로 한동안 혼자만의 방에 들어앉아 있어야 했던 유폐의 시간동안 나는 글을 쓸 수 없었다. 무조건적으로 거울을 바라보거나 창밖으로 타인만을 관찰해서는 자신을 올바로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산책을 위해서는 군중이 필요하지만 군중 또한 산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관건은 산책자의 시선과 군중의 시선 사이의 균형이다. 소설은 위기의식을 자양분으로 삼는 양식이다. 허구를 지어내려는 본능이 삶의 유한성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처럼 소설의 위기가 계속되는 한 소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산책의 종말이 찾아올 때 소설 또한 종말을 맞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