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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은 Ko Un
2017 서울국제문학포럼 - 우리와 타자

나 또는 우리 그리고 타자를 생각하면서

고 은

창(窓)이 있어야 창밖을 내다볼 수 있습니다. 이 방안에서 내 발언은 모든 것이 나타나는 ‘의미장(意味場)’은 아닙니다.

‘우리’는 인류사적인 험난한 유고(有故)의 생존과정에서 태어납니다. 당장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둘 이상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상태가 명사보다 동사를 먼저 만들어 내게 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하다’라는 것 말입니다. 관계의 시작이 존재의 시작을 앞섭니다. 인류 각자가 태어나는 것과 죽는 것은 ‘나’의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삶의 진행 자체는 ‘우리’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나’는 항상 둘 이상의 ‘우리’ 속에서만 생존지속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같은 오랜 삶의 사회적 형식을 거슬러 ‘나’라는 실존이 솟아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어떤 ‘나’로서도 혼자 설 수 없습니다. ‘나’는 나만으로 구성된 단일 생명체가 아닙니다. 내 몸 안의 세포 90%는 미생물세포이고 유전자 또한 미생물의 그것이 4백40만이라면 인간 유전자는 기껏 2천개에 불과합니다. 그럴진대 인간의 생물학적 정의(定義)로는 기껏 5%의 인간으로 ‘나’는 궁색하게 성립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 근원에서부터 타자들 속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미망(迷妄)인가 하는 질문이 일어납니다.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의 제1권 『더 나은 삶에 관한 꿈』의 서문의 첫 문단(文段)은 오랜 근원적 질문이 넘칩니다.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향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며 무엇이 우리를 맞이할 것인가?’ 이 책의 제1장 첫 소제목도 인상적입니다. ‘우리는 공허하게 시작한다.’

한국어의 ‘우리’는 울타리를 뜻한다고 할 때 그것은 지난 농경시대 자연부락이 상부상조하는 관습윤리를 이어온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울타리는 하나의 내적 자아를 이루고 그 자아의 집합단위를 공동으로 방어하는 경계를 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락 안의 가가호호가 곧 친화와 자위(自衛)의 ‘우리’일 것입니다. 고대 동북아시아의 상형문자로 ‘나’를 가리키는 ‘아(我)’는 외부의 침입이나 적을 물리칠 무장(武裝)의 전사(戰士)를 상형(象形)하고 있습니다. 또한 마을(우리)과 다른 마을(타자)를 잇는 ‘길(道)’의 상형은 두 마을 사이나 다른 마을로 낸 길목에 적장(敵將)의 베힌 머리를 창대 끝에 꽂아 내걸어서 적을 굴복시키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사람의 생존방식이나 사람이 찾는 진리라는 ‘도(道)’의 본의가 이처럼 살벌한 경고와 적의를 담은 타자 배척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나(我)’를 초월한 ‘오(吾)’에서는 이런 증오나 갈등을 벗어난 1인칭 ‘나’의 경지를 만납니다. 여기서는 ‘나’가 아닌 ‘우리’라는 대국(大局)의 자아를 오롯이 강조합니다. 한국 현대사의 귀중한 주체담론이기도 한 1919년의 독립선언서 첫머리는 ‘오등(吾等)은...’이라는 비전투적인 ‘우리’를 내세웁니다. (후략)